솔직히말해 시위대나 그런 쪽의 입장에서 촛불의 실용성에 대한 회의가 있다는 데에는 조금 놀랐습니다. 아니, 물론 그런 시각이 없을 리는 없겠지만 그러한 종류의 회의를 이렇게나 손쉽게 곳곳에서 접하게 된다는 것에서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도 어쩌면 실용오덕정권창출의 근원에 있는 실용만능시대의 반영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건 무척 당연하고 재미없게도 그런 염려들이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일테죠.
촛불시위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측하자면 답은 너무도 쉽게 나옵니다. 운동을 통해 가시적인 어떤 성과의 유무를 진단하자는 그런 시각에서라면, 이 운동은 애초에 어떠한 성과를 거둘 가능성도 극도로 희박하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실용적인 면에서 개인적으로 거칠게 이 운동의 끝을 예측해볼까요? 망할겁니다. 사실 붕괴나 궤멸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로 불분명하고 모호한 종말을 맞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도 운동 이전보다 더 고약하고 지독한 공안정국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공안면에서 더욱 극단적인 선택이 나올지도 모르지요(수행도=한건 올린 수 인 기업마인드로는 북진통일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은 너무나도 탐나는 것일테죠. 기업마인드에서 젊은이의 피는 자본일 뿐입니다). 운동에 참가한 상당수의 시민들 또한 이전보다 더욱 확고한 자신의 보수성향으로 회귀할 겁니다. 이 운동이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 이전에 왜곡되거나 미미한 형태로 존재했던 각 집단의 정체성을 뚜렷이 부각시키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암울한 결과가 보이는 부분입니다. 공안정국과는 별개로 정부의 영향력도 커질겁니다. 내년 하반기쯤 되어 대다수의 예측대로 투기자본이 빠져나간 자원시장이 안정을 찾게되면 어찌되었건 리각하의 임기내로 경제적 최저점을 지난 뒤의 반등세가 있을 가능성이 있고, 물론 그것은 이전의 상황보다 훨씬 악화된 지점이겠지만 낮가죽 두꺼운 지배세력은 경제를 살려내고말았다고 자화자찬하기에 충분할 겁니다. 더 나쁜건 정말로 상당수의 국민들이 그에 동조해서 역시 보수세력이 경제하난 잘 살린다고 할테구요. 이미 지겹도록 보고 반박해도 조중동에 가로막혀 논쟁이 되지않았던 수십년동안 있었던 일이 아닙니까. 이런 전망이 다 빗나가더라도 어쨌건 독재자의 딸은 무난히 국가지도자가 될 겁니다. 그리고 자기반성능력이 없는 일단의 무리들은 보수성향으로 회귀한 시민들의 이전보다 격앙된 지지를 토대로 공고히 지배체제를 굳혀 적어도 꽤 오랜기간 대한민국은 살기조흔 자유시장민주사회가 될테지요.
그런 전망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전의 수많은 선례들과 지금 운동의 유사점 때문이고, 그 이유만으로도 저는 저러한 전망의 많은 부분이 현실이 될 거라고 상당히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완연한 구시대모순과의 충돌이었던 대혁명 이후의 , 체제내부의 모순과 갈등에서 비롯된 시민운동의 거의 대부분은, 운동이 추구하는 목표의 달성과 타협적인 성과의 수용사이에서 흐지부지 끝나지 않았습니까. 표면적인 요구사항 깊숙한 곳에 내재된 시민권적 가치달성을 목표로 한 운동이 민중의 상상이상의 결집을 통해 일차적인 성과를 거둔 다음에 그것을 기다린 운명은, 그런 운동의 지속을 주장하는 세력을 가장 좌절시킨것은, 경찰의 진압이나 군대의 투입이 아니라 위정자나 보수적 사회가 내어놓은 일차적 타협안에 만족하여 그런 작은 성과나마 '현실적으로 지켜내기 위해선' 운동을 멈추어야한다는 내부의 저지였습니다. 그 수많은 운동, 1849년의 운동들부터 시작하여 폴란드, 헝가리, 천안문, 포르투갈, 스페인, 미국의 공민권 운동, 그리고 무엇보다 68년부터 시작된 각국의 수많은 운동들이 맞이했던 공통적인 운명입니다. 그게 우연은 아닐겁니다. 아마 현대사회에서 그런 종류의 대중운동이란 이미 시작부터 같은 결말을,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획득하고 지켜낼 수 있는 성과와 이루고자하는 목표가 원초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있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겁니다.
그런 면에서 쇠고기란 가시적이지만 무척이나 빈약한 대의를 지닌 목표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여 진행된 이번 운동은 더욱 그 장래가 '암울'할지도 모릅니다. 실제로는 쇠고기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시민정신의 집합이면서도 동시에 공적인 표면에서는 쇠고기문제가 중요이슈인지 아닌지를 스스로도 고민하는 운동입니다. 대체 실용적인 면에서, 애초에 무엇을 기대했던 겁니까. 이 운동에 내재된 시민적 요구의 어느정도가 정부와 권력으로 부터 받아들여졌는지를 성패의 기준으로 삼는 거라면, 이러한 운동은 애초에 그 무엇하나 달성하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어낸 몇몇 성과(있긴한가라는 의문은 차치하고)들은 어쩌면 기대이상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시민적 가치가 달성되었다기보다는 이쯤에서 좋게 끝내자는 이 보수적 사회의 깊숙한 무의식이 내어놓은 암묵적인 신호에 불과합니다. 정부는 답답하겠지요. 이쯤하면 눈치 좀 차려서 이긴척하고 집에 가서 좀 쉴만도 한데 왜 자꾸 거리에 나오는지. 천년만년 거리에서 살 것도 아닌데.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일탈이 바로 21세기환경을 맞이한 시민참여와 19세기로 타임슬립한 권력마인드의 간극입니다. 그리고, 이 충돌에서 궁극적으로는 물질적 권력을 쥐고있는 지배체제가 승리할 겁니다. 겉으로는.
자, 그렇다면 이번엔 제가 묻겠습니다.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입니까. 뭘 어쩌란 말입니까. 완고한 질서가 스스로를 유지시키는 지점에서 적당히 (약간은 급조된) 시민정신과 타협해 내어놓은 암묵적 신호에서, 이쯤에서 그만둬야 서로가 유용한 것을 얻는다는 경제적 합의점에서 그만두지 않고, 그래서 그 결과 의도치 않았던 더욱 끔찍한 상황이 찾아온다고 해서,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한단 말입니까. 그것을 받아들이란 말입니까? 그것을 받아들여서, 20세기의 다른 운동들이 겪었던 슬픈 결말을 피하는 현명함을 발휘하기라도 하잔 겁니까?
전 사람들이 덜 현명해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난 비극적인 전철들이 실은 철저한 실패보다는 21세기에 마땅히 있어야만한다고 믿는, 지금 광화문에서 사람들이 그리고 있는 세상의 저편에 있는 그런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고, 그랬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만약 당신이 거리로 나섰던 이유가,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부조리가 아니라 다른 어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있게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당신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런 가치를 당연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전의 저 실패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 많은 19세기와 20세기의 비참한 실패 없이도, 우리가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무한대의 자유를 추구하며, 시민적 기본권은 체제권력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을까요. 68의 흥분이 몽둥이와 총칼로 제거된 파리에서 결국 미래적인 시민상이 완결되었음을 잊지 맙시다(사르코지의 반동정치는 물론 실재합니다. 하지만 68이 일군 시민적 체제의 영구성에 비하면 그것은 한 때의 부침일 뿐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지금 필요한 건 그 실패를 두려워해서 허겁지겁 타의에 의한 협상을 받아들이는 실용적인 현명함이 아니라, 진짜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실패를 눈앞에 둔 우리의 불굴과 용기입니다. 실패하고, 기억합시다. 기억이 최고의 무기입니다.